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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몬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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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루이스 몬티는 아르헨티나와 이탈리아 국적을 모두 가진 축구 선수로, 클럽과 국가대표팀에서 활약했다. 1921년 우라칸에서 선수 경력을 시작하여 산 로렌소를 거쳐 유벤투스에서 세리에 A 4연패를 달성했다. 아르헨티나 국가대표팀 소속으로 1927년 남미 선수권 대회 우승, 1928년 올림픽 은메달, 1930년 월드컵 준우승을 경험했으며,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는 1934년 월드컵 우승을 이끌었다. 은퇴 후 감독으로 활동했으며, 1983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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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스 몬티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34년의 루이스 몬티
1934년, El Gráfico 표지의 몬티
본명루이스 펠리페 몬티
출생일1901년 5월 15일
출생지부에노스아이레스, 아르헨티나
사망일1983년 9월 9일
사망지에스코바르 파르티도, 아르헨티나
포지션미드필더
클럽 경력
유소년 클럽해당 정보 없음
클럽1921: 우라칸
1922: 보카 주니어스
1922–1930: 산로렌소
1930–1939: 유벤투스
출장 및 득점CA 우라칸: 4경기 0골
보카 주니어스: 0경기 0골
CA 산로렌소: 202경기 40골
유벤투스: 225경기 19골
총 출장 및 득점431경기 59골
국가대표 경력
국가대표1924–1931: 아르헨티나
1932–1936: 이탈리아
출장 및 득점아르헨티나: 16경기 5골
이탈리아: 18경기 1골
감독 경력
감독1939–1940: 트리에스티나
1942: 유벤투스
1942–1943: 바레세
1944: 바레세
1945–1947: 아탈란타
1947: 비제바노
1947–1948: 우라칸
1949–1950: 피사
수상 내역
메달남자 축구
코파 아메리카1927년 페루: 금메달
FIFA 월드컵1930년 우루과이: 은메달
1934년 이탈리아: 금메달
올림픽 축구1928년 암스테르담: 은메달
중부 유럽 국제 컵1933–35년 유럽: 금메달

2. 경력

루이스 몬티는 아르헨티나이탈리아 양국에서 성공적인 축구 선수 경력을 쌓았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우라칸과 산 로렌소에서 리그 우승을 경험했으며, 아르헨티나 대표팀 소속으로 1927년 남미 축구 선수권 대회 우승, 1928년 하계 올림픽 은메달, 1930년 FIFA 월드컵 준우승에 기여했다.[17][6] 이후 이탈리아로 건너가 유벤투스에서 4회 연속 세리에 A 우승을 이끌었고,[8] 이탈리아 대표팀의 일원으로 1933-35년 중부 유럽 선수권 대회 우승과 1934 FIFA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다.[4] 그는 서로 다른 두 국가대표팀 소속으로 FIFA 월드컵 결승에 진출한 유일한 선수로 기록되어 있다. 선수 은퇴 후에는 축구 감독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2. 1. 클럽 경력

루이스 몬티는 1921년 우라칸에서 선수 경력을 시작하여 첫 우승을 경험했다. 이듬해 보카 주니어스와 잠시 계약했으나 경기에 출전하지는 못했고, 이후 산 로렌소에 합류하여 아르헨티나 리그에서 세 차례 더 우승을 차지했다. 그의 아르헨티나 시절 우승 기록은 모두 아마추어 시대에 해당한다.

1930년, 이탈리아 시민권을 바탕으로 이탈리아유벤투스로 이적했다. 이적 초기에는 컨디션 난조를 겪기도 했으나, 곧 기량을 회복하여 팀의 핵심 선수로 자리 잡았다. 그는 유벤투스가 1932년부터 1935년까지 4회 연속 세리에 A 우승을 달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팀의 주장을 맡기도 했다.[8] 유벤투스 소속으로 세리에 A에서 총 225경기에 출전하여 19골을 기록했다.

2. 1. 1. 아르헨티나

1925년, 산 로렌소 시절의 몬티.


루이스 몬티는 1921년 우라칸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하여 첫 리그 우승을 경험했다. 이듬해인 1922년에는 보카 주니어스와 계약했지만, 한 경기도 뛰지 않고 팀을 떠났다. 이후 산 로렌소로 이적하여 아르헨티나 리그에서 세 차례 더 우승을 차지했다. 몬티가 아르헨티나에서 거둔 모든 리그 우승은 아마추어 시대에 해당한다.

몬티는 1924년에 처음으로 아르헨티나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었다. 그는 1927년 남미 축구 선수권 대회 우승과 1928년 하계 올림픽 은메달 획득에 기여했다.[17][6] 몬티를 주축으로 한 아르헨티나는 1930년 FIFA 월드컵에서 프랑스, 멕시코, 칠레, 미국을 차례로 꺾고 결승에 진출했다. 이 과정에서 몬티는 2골을 기록했으며, 거친 플레이로 상대 선수들에게 부상을 입히기도 했다. 일부 출처에 따르면 몬티 본인도 부상을 안고 뛰었으며, 살해 협박까지 받았다고 전해진다.[18][7]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그는 우루과이와의 결승전에 출전했으나, 팀은 2-4로 패배하여 준우승에 머물렀다.

2. 1. 2. 이탈리아

1930년, 이미 이탈리아 국적을 가지고 있던 몬티는 이탈리아유벤투스로 이적했다. 이적 당시 그는 과체중이었고 기량이 떨어진 상태였으나, 한 달간의 혹독한 개인 훈련을 통해 다시 최고의 기량을 되찾았다.[8] 그는 유벤투스세리에 A를 1932년부터 1935년까지 4년 연속 우승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팀의 주장도 맡았다. 몬티는 세리에 A에서 통산 225경기에 출전하여 19골을 기록했다. 1930년대 동안 그는 풀백 버지니오 로세타와 움베르토 칼리가리스와 함께 강력하고 성공적인 수비 삼각편대를 이루었다.[8]

1930년대 초 유벤투스에서 뛰던 몬티


유벤투스 이적 후 약 1년 뒤인 1932년, 몬티는 '오리운도'(oriundo, 외국 태생의 이탈리아계 선수) 자격으로 이탈리아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었다. 그는 1933-35년 중부 유럽 선수권 대회 우승에 기여했으며, 개최국 자격으로 참가한 1934년 FIFA 월드컵에서는 이탈리아의 우승을 이끌었다. 이탈리아는 결승전에서 체코슬로바키아를 2-1로 꺾었으며[15][4], 몬티는 재경기를 포함한 대회 5경기 모두에 출전했다.

1934년 11월 14일, 잉글랜드와의 친선 경기, 일명 '하이베리 전투'(Battle of Highbury영어)가 아스널의 홈 구장인 하이베리에서 열렸다. 이 경기에서 몬티는 이탈리아의 센터 하프로 선발 출전했으나, 경기 시작 단 2분 만에 잉글랜드의 센터 포워드 테드 드레이크와 강하게 충돌하여 발에 골절상을 입었다. 당시에는 선수 교체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이탈리아는 10명으로 남은 시간을 싸워야 했고, 결국 2-3으로 패배했다.[9] 이 부상 이후 몬티는 이탈리아 대표팀으로 단 두 경기만을 더 소화했다.

몬티는 이탈리아 대표팀 소속으로 1932년부터 1936년까지 총 18경기에 출전하여 1골을 기록했다.

2. 2. 국가대표팀 경력

몬티는 1924년 아르헨티나 국가대표팀에 처음 발탁되어 1930년 FIFA 월드컵 준우승을 이끌었다.[6] 이후 이탈리아 시민권을 바탕으로 ''오리운도'' 자격을 얻어 1932년부터 이탈리아 국가대표팀에서도 뛰게 되었다. 그는 이탈리아 대표팀 소속으로 1934 FIFA 월드컵 우승을 차지하며[4], 서로 다른 두 국가대표팀 소속으로 FIFA 월드컵 결승 무대를 밟은 유일한 선수가 되었다. 1934년에는 잉글랜드와의 격렬했던 친선 경기(하이bury 전투) 도중 부상을 입기도 했다.[9] 몬티는 아르헨티나(1924년~1931년, 16경기 5골)와 이탈리아(1932년~1936년, 18경기 1골) 양국 대표팀에서 활약했다.

2. 2. 1. 아르헨티나



몬티는 1921년 우라칸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하여 첫 리그 우승을 경험했다. 이듬해 보카 주니어스와 계약했으나, 한 경기도 뛰지 않고 팀을 떠났다. 이후 산 로렌소로 이적하여 아르헨티나 리그 우승을 세 차례 더 차지했다. 그가 아르헨티나에서 거둔 모든 리그 우승은 아마추어 시대에 달성한 것이다.

1924년, 몬티는 아르헨티나 국가대표팀에 처음으로 발탁되었다. 그는 1927년 남미 선수권 대회에서 아르헨티나의 우승에 기여했고, 1928년 암스테르담 하계 올림픽에서는 은메달을 획득했다.[17]

1930년 우루과이 월드컵에서 몬티는 아르헨티나의 핵심 선수로 활약했다. 아르헨티나는 프랑스, 멕시코, 칠레, 미국을 차례로 꺾고 결승에 진출했다. 몬티는 이 과정에서 2골(준결승 미국전)을 기록했으며, 거친 플레이로 상대 선수들에게 부상을 입히기도 했다. 일부에서는 몬티 자신도 부상을 안고 뛰었다고 전하지만, 살해 협박까지 받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18] 그는 우루과이와의 결승전에 출전하여 팀의 2-4 패배를 지켜보았다.

몬티의 아르헨티나 국가대표팀 주요 경력은 다음과 같다.

대회연도성적비고
남미 선수권 대회1927년우승
암스테르담 올림픽1928년준우승
1930년 FIFA 월드컵1930년준우승4경기 2득점


  • '''통산 기록''': 1924년–1930년, 16경기 5득점

2. 2. 2. 이탈리아



1930년, 이탈리아 시민권을 가지고 있던 몬티는 이탈리아의 명문 클럽 유벤투스에 입단했다.[8] 당시 그는 과체중 상태였고 컨디션이 좋지 않아 입단 초기 한 달 동안 개인 훈련에 집중해야 했다. 훈련을 통해 최고의 기량을 되찾은 몬티는 유벤투스가 1932년부터 1935년까지 4회 연속 세리에 A 우승을 차지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팀의 주장을 맡기도 했다. 그는 유벤투스 소속으로 세리에 A에서 통산 225경기에 출전하여 19골을 기록했다. 1930년대 유벤투스에서 그는 풀백 버지니오 로세타, 움베르토 칼리가리스와 함께 강력하고 성공적인 수비 삼각편대를 구축했다.[8]

유벤투스 입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오리운도 자격으로 1932년 이탈리아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었다. 그는 이탈리아 대표팀의 일원으로 1933–35 중부 유럽 국제 컵 우승에 기여했다. 또한, 개최국 자격으로 참가한 1934 FIFA 월드컵에서 이탈리아의 우승을 이끌었다. 이탈리아는 결승전에서 체코슬로바키아를 2-1로 꺾었으며[4], 몬티는 재경기를 포함한 대회 5경기 모두에 출전하며 중원의 핵심으로 활약했다.

1934년 11월 14일, 런던의 하이bury 경기장에서 열린 잉글랜드와의 친선 경기는 격렬한 양상으로 인해 '하이bury 전투'로 불리게 되었다. 당시 아스널의 홈 구장에서 열린 이 경기에서 몬티는 이탈리아의 중앙 미드필더로 선발 출전했으나, 경기 시작 단 2분 만에 잉글랜드의 센터 포워드 테드 드레이크와의 강한 충돌로 발에 골절상을 입었다. 당시에는 선수 교체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이탈리아는 남은 시간을 10명으로 싸워야 했고, 결국 2-3으로 패배했다.[9] 이 부상 이후 몬티는 이탈리아 대표팀으로 단 두 경기에만 더 출전했다.

몬티는 이탈리아 국가대표팀 소속으로 1932년부터 1936년까지 총 18경기에 출전하여 1골을 기록했다.

연도대회결과출전 기록
1934년1934 FIFA 월드컵우승5경기 0득점


2. 2. 3. 하이버리의 전투

하이버리의 전투(Battle of Highbury|배틀 오브 하이버리eng)는 1934년 11월 14일 아스널의 홈 구장이었던 하이버리에서 이탈리아잉글랜드 사이에 열린 친선 경기였다.[19][9] 몬티는 이 경기에서 이탈리아의 센터 하프로 출전했다. 그러나 경기 시작 단 2분 만에 잉글랜드의 센터 포워드 테드 드레이크와 충돌하여 발에 골절상을 입고 경기를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19][9] 당시에는 교체 선수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이탈리아는 10명으로 경기를 치러야 했고, 결국 2-3으로 패배했다.[19][9] 이 부상 이후 몬티는 이탈리아 국가대표팀 경기에 단 두 번만 더 출전했다.[19][9]

2. 3. 은퇴 후

몬티는 은퇴 후 축구 감독으로 활동했다. 그는 1947년에 우라칸의 1군 감독을 맡았다. 1983년, 향년 82세로 세상을 떠났다.

3. 국가대표팀 득점 기록

''아래의 점수에서 왼쪽의 점수가 아르헨티나의 점수이다.''

#날짜경기장상대점수최종결과대회
1.1924년 8월 31일우루과이 몬테비데오 센테나리오우루과이3–03–2친선경기
2.1928년 6월 13일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올림픽 경기장우루과이1–11–21928년 하계 올림픽
3.1930년 7월 15일우루과이 몬테비데오 센테나리오프랑스1–01–01930년 FIFA 월드컵
4.1930년 7월 26일우루과이 몬테비데오 센테나리오미국1–06–11930년 FIFA 월드컵
5.1931년 7월 4일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스포르티보 바라카파라과이1–11–1친선경기



''아래의 점수에서 왼쪽의 점수가 이탈리아의 점수이다.''

#날짜경기장상대점수최종결과대회
1.1933년 12월 3일이탈리아 피렌체 스타디오 아르테미오 프란키스위스5–25–21933-35년 중부 유럽 선수권 대회


3. 1. 아르헨티나



몬티는 1921년 우라칸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하여 첫 리그 우승을 경험했다. 이듬해인 1922년에는 보카 주니어스와 계약했으나, 한 경기도 뛰지 못하고 팀을 떠났다. 이후 산 로렌소로 이적하여 아르헨티나 리그에서 세 번 더 우승을 차지했다. 몬티가 아르헨티나에서 거둔 모든 리그 우승은 아마추어 시대에 이룬 것이다.

1924년, 몬티는 처음으로 아르헨티나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었다. 그는 아르헨티나 대표팀 선수로서 1927년 남미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했고, 1928년 암스테르담 하계 올림픽에서는 은메달을 획득했다.[17][6]

몬티는 1930년 우루과이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의 핵심 선수로 활약했다. 아르헨티나는 프랑스, 멕시코, 칠레, 미국을 차례로 꺾고 결승에 진출했다. 몬티는 이 대회 4경기에 모두 출전하여 2골을 기록했으며, 특히 준결승 미국전에서 득점했다. 그는 거친 플레이로 상대 선수들에게 부상을 입히기도 했다. 결승전을 앞두고 살해 협박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지나,[18][7] 몬티는 우루과이와의 결승전에 출전했고, 팀은 2-4로 패배하여 준우승에 머물렀다. 몬티는 1924년부터 1931년까지 아르헨티나 국가대표로 총 16경기에 출전하여 5골을 기록했다.

'''아르헨티나 국가대표팀 득점 기록'''

#날짜경기장상대점수최종결과대회
1.1924년 8월 31일우루과이 몬테비데오 센테나리오우루과이3–03–2친선경기
2.1928년 6월 13일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올림픽 경기장우루과이1–11–21928년 하계 올림픽
3.1930년 7월 15일우루과이 몬테비데오 센테나리오프랑스1–01–01930년 FIFA 월드컵
4.1930년 7월 26일우루과이 몬테비데오 센테나리오미국1–06–11930년 FIFA 월드컵
5.1931년 7월 4일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스포르티보 바라카파라과이1–11–1친선경기


3. 2. 이탈리아



1931년, 몬티는 이탈리아 시민권을 바탕으로 이탈리아의 빅 클럽인 유벤투스와 계약을 맺었다.[8] 처음에는 과체중으로 컨디션이 좋지 않았으나, 한 달간의 개인 훈련을 통해 최고의 기량을 되찾았다. 그는 유벤투스가 1932년부터 1935년까지 4시즌 연속 세리에 A 우승을 차지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클럽의 주장을 맡기도 했다. 몬티는 유벤투스 소속으로 세리에 A 통산 225경기에 출전하여 19골을 기록했다. 1930년대 유벤투스에서 그는 풀백 버지니오 로세타와 움베르토 칼리가리스와 함께 강력하고 성공적인 수비 삼각편대를 구축했다.[8]

유벤투스 입단 1년 후인 1932년, 몬티는 ''오리운도'' 자격으로 이탈리아 국가대표팀에 소집되었다. 그는 이탈리아가 개최국으로 참가한 1934 FIFA 월드컵에서 체코슬로바키아를 2-1로 꺾고 우승하는 데 기여했으며, 재경기를 포함한 5경기 모두 출전했다.[4] 또한 1933–35 중부 유럽 국제 컵에서도 우승하며 성공적인 대표팀 경력을 이어갔다.

1934년 11월 14일, 아스널의 홈 구장인 하이bury에서 열린 잉글랜드와의 친선 경기, 이른바 하이bury 전투에서 몬티는 이탈리아의 센터 하프로 출전했다. 그러나 경기 시작 단 2분 만에 잉글랜드의 센터 포워드 테드 드레이크와 충돌하여 발에 골절상을 입었다. 당시에는 교체 선수 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이탈리아는 10명으로 경기를 치러야 했고, 결국 2-3으로 패배했다.[9] 이 부상 이후 몬티는 이탈리아 대표팀으로 단 두 경기만 더 출전했다.

몬티는 이탈리아 대표팀 소속으로 1932년부터 1936년까지 총 18경기에 출전하여 1골을 기록했다.

'''이탈리아 대표팀 득점 기록'''

''아래의 점수에서 왼쪽의 점수가 이탈리아의 점수이다.''

#날짜경기장상대점수최종결과대회
1.1933년 12월 3일이탈리아 피렌체 스타디오 아르테미오 프란키스위스5–25–21933-35년 중부 유럽 선수권 대회


4. 수상 내역

'''클럽'''



'''국가대표팀'''

'''개인'''

4. 1. 선수

루이스 몬티는 1921년 우라칸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하여 첫 리그 우승을 경험했다. 이듬해 보카 주니어스와 계약했지만 경기에 출전하지 않고 팀을 떠났고, 이후 산 로렌소에 합류하여 아르헨티나 선수권 대회에서 세 차례 더 우승했다. 몬티가 아르헨티나에서 거둔 모든 우승은 아마추어 시대에 해당한다.

1924년 아르헨티나 국가대표팀에 처음 발탁된 몬티는 1927년 남미 축구 선수권 대회 우승과 1928년 하계 올림픽 은메달 획득에 기여했다.[6] 그는 아르헨티나의 핵심 선수로서 1930년 FIFA 월드컵 준우승을 이끌었으며, 이 과정에서 2골을 기록했다. 결승전 직전 살해 협박을 받는 등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7]

1930년, 이탈리아 시민권을 활용하여 이탈리아 클럽 유벤투스로 이적했다. 초기에는 컨디션 난조를 겪었으나, 개인 훈련을 통해 기량을 회복하고 팀의 세리에 A 4연패(1932년~1935년)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주장을 맡기도 했다. 1930년대 유벤투스에서 그는 풀백 버지니오 로세타와 움베르토 칼리가리스와 함께 강력한 수비 삼각편대를 구축했다.[8] 유벤투스 소속으로 총 225경기에 출전하여 19골을 기록했다.

유벤투스 이적 1년 후, 몬티는 ''오리운도''(oriundo) 자격으로 이탈리아 국가대표팀에 소집되었다. 그는 개최국 이탈리아의 1934년 FIFA 월드컵 우승에 기여했으며,[4] 1933-35년 중앙 유럽 국제컵에서도 우승을 차지했다. 이로써 몬티는 서로 다른 두 국가대표팀 소속으로 FIFA 월드컵 결승전에 진출한 유일한 선수라는 특별한 기록을 남겼다. 1934년 잉글랜드와의 친선 경기인 하이베리 전투에서는 경기 초반 발 골절상을 입기도 했다.[9]

몬티는 아르헨티나 대표팀으로 1924년부터 1931년까지 총 16경기 5골을, 이탈리아 대표팀으로는 1932년부터 1936년까지 총 18경기 1골을 기록했다.

4. 1. 1. 클럽



몬티는 1921년 우라칸에서 선수 경력을 시작하여 첫 리그 우승을 경험했다. 이듬해 그는 보카 주니어스와 계약했지만, 한 경기도 뛰지 않고 팀을 떠났다. 이후 산 로렌소로 이적하여 아르헨티나 리그에서 세 번 더 우승(1923, 1924, 1927)을 차지했다. 몬티가 아르헨티나에서 거둔 모든 리그 우승은 아마추어 시대에 해당한다.

1930년, 이미 이탈리아 국적을 가지고 있던 몬티는 이탈리아의 유벤투스로 이적했다. 이적 당시 그는 과체중이었고 기량이 떨어진 상태였으나, 한 달간의 혹독한 개인 훈련을 통해 컨디션을 회복했다. 몬티는 최고의 기량을 되찾아 유벤투스가 1932년부터 1935년까지 4년 연속 세리에 A 우승을 차지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팀의 주장도 맡았다. 1930년대 유벤투스에서 그는 풀백 버지니오 로세타와 움베르토 칼리가리스와 함께 강력하고 성공적인 수비 트리오를 형성했으며, 이들은 그의 뒤에서 뛰었다.[8] 몬티는 유벤투스 소속으로 이탈리아 무대에서 총 225경기에 출전하여 19골을 기록했으며, 1938년에는 코파 이탈리아 우승컵도 들어 올렸다.

=== 우승 기록 ===


4. 1. 2. 국가대표팀

몬티는 1924년 아르헨티나 국가대표팀에 처음으로 발탁되었다. 그는 아르헨티나 대표팀 소속으로 1927년 남미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을 경험했고, 1928년 암스테르담 하계 올림픽에서는 은메달을 획득했다.[17][6]

1930년 FIFA 월드컵에서 몬티는 아르헨티나의 핵심 선수로 활약했다. 아르헨티나는 프랑스, 멕시코, 칠레, 그리고 준결승에서 미국을 차례로 꺾고 결승에 진출했다. 몬티는 이 과정에서 2골(준결승 미국전 1골 포함)을 기록했으며, 때로는 거친 태클로 상대 선수들에게 부상을 입히기도 했다. 결승전 직전 살해 협박을 받는 등[18][7]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그는 우루과이와의 결승전에 출전했으나, 팀은 2-4로 패배하여 준우승에 머물렀다.

1931년 유벤투스로 이적한 몬티는 이미 보유하고 있던 이탈리아 국적을 바탕으로, 이적 1년 만인 1932년에 ''오리운도''(oriundo, 외국 출신 이탈리아계 선수) 자격으로 이탈리아 국가대표팀에 소집되었다. 그는 개최국 이탈리아의 1934년 FIFA 월드컵 우승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탈리아는 결승전에서 체코슬로바키아를 2-1로 꺾고 우승컵을 들어 올렸으며,[15][4] 몬티는 재경기를 포함한 5경기 모두 출전했다. 또한, 그는 1933-35년 중앙 유럽 국제컵 우승 멤버이기도 했다.

1934년 11월 14일, 런던 하이베리에서 열린 잉글랜드와의 친선 경기, 소위 '하이베리 전투'(Battle of Highbury)에서 몬티는 경기 시작 단 2분 만에 잉글랜드의 센터 포워드 테드 드레이크와 충돌하여 발에 골절상을 입고 경기장을 떠나야 했다. 당시에는 선수 교체가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탈리아는 10명으로 싸워야 했고, 결국 2-3으로 패배했다.[9] 이 부상 이후 몬티는 이탈리아 대표팀으로 단 두 경기만을 더 소화했다.

몬티는 아르헨티나 대표팀으로 1924년부터 1931년까지 총 16경기에 출전하여 5골을 기록했고, 이탈리아 대표팀으로는 1932년부터 1936년까지 총 18경기에 출전하여 1골을 기록했다.

'''국가대표팀 주요 성과'''

국가대표팀대회성과연도
아르헨티나남미 축구 선수권 대회우승1927
하계 올림픽준우승1928
FIFA 월드컵준우승1930
이탈리아FIFA 월드컵우승1934
중앙 유럽 국제컵우승1933–35



'''국가대표팀 통산 기록'''

국가대표팀활동 기간출장득점
아르헨티나1924–1931165
이탈리아1932–1936181


4. 1. 3. 개인



몬티는 1921년 우라칸에서 선수 경력을 시작하며 첫 우승을 경험했다. 이듬해 보카 주니어스와 계약했지만, 경기에 출전하지 않고 팀을 떠나 산 로렌소에 합류했다. 산 로렌소 소속으로 아르헨티나 선수권 대회에서 세 차례 더 우승했는데, 이 시기는 아마추어 시대에 해당한다.

몬티는 1924년 처음으로 아르헨티나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었다. 그는 1927년 남미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했으며 1928년 하계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획득했다.[6] 몬티를 핵심 선수로 기용한 아르헨티나는 1930년 FIFA 월드컵 결승까지 진출하여 프랑스, 멕시코, 칠레, 그리고 미국을 꺾었다. 몬티는 그 과정에서 2골을 넣었고, 태클로 상대 선수들을 부상시켰다. 일부에서는 몬티가 부상을 입고 있었다고 추측하지만, 진실이 무엇이든, 그리고 살해 협박에도 불구하고,[7] 그는 우루과이가 4-2로 승리하는 경기에서 조용히 경기를 치렀다.

1930년 몬티는 이탈리아 시민권을 가지고 있어 이탈리아 클럽 유벤투스에 입단했다. 그는 과체중이었고 컨디션이 좋지 않아 한 달 동안 고독한 훈련을 했다. 몬티는 최고의 기량을 되찾아 유벤투스가 4번의 세리에 A 타이틀(1932~1935)을 획득하는 데 기여했으며, 클럽의 주장 역할을 수행했다. 몬티는 이탈리아에서 225경기에 출전하여 19골을 기록했다. 1930년대 동안 그는 풀백 버지니오 로세타와 움베르토 칼리가리스와 함께 클럽에서 강력하고 성공적인 수비 트리오를 형성했으며, 이들은 그의 뒤에서 뛰었다.[8]

그는 또한 1년 안에 ''오리운도'' 자격으로 이탈리아 국가대표팀에 소집되었다. 개최국 이탈리아는 1934년 월드컵 결승에 진출하여 체코슬로바키아를 2-1로 꺾었다.[4] 또한 그는 1933–35 중부 유럽 국제 컵에서 우승한 성공적인 팀의 일원이었다.

하이bury 전투는 1934년 11월 14일, 아스널의 홈 구장인 하이bury에서 이탈리아와 잉글랜드 간에 열린 경기이다. 몬티는 이탈리아의 센터 하프 선수로 출전했지만, 경기 시작 2분 만에 잉글랜드 센터 포워드 테드 드레이크와의 충돌로 발에 골절상을 입었다. 교체 선수 제도가 없던 시절이라, 10명이서 경기를 치른 이탈리아는 2-3으로 패했다.[9] 몬티는 이후 이탈리아 대표팀으로 단 두 번 더 출전했다.

몬티는 아르헨티나 대표팀으로 1924년부터 1931년까지 총 16경기(5골)를 뛰었고, 이탈리아 대표팀으로는 1932년부터 1936년까지 총 18경기(1골)를 기록했다.

4. 2. 감독

몬티는 은퇴 후 축구 감독이 되었다. 1947년, 그는 우라칸의 1군을 맡았다.

참조

[1] 웹사이트 Luis Monti https://www.olympedi[...] 2021-09-11
[2] 웹사이트 Azzurro oriundo, ma serve in un Mondiale? GQ Italia 2015-06-02
[3] 웹사이트 The relationship between a player's age and their position on a football pitch 2016-01-22
[4] 뉴스 1934 World Cup: Italy wins for Il Duce http://www.cbc.ca/sp[...] Canadian Broadcasting Corporation 2018-05-21
[5] 문서 Luis Monti http://www.planetwor[...]
[6] Sports-Reference https://www.sports-r[...]
[7] webarchive Death threat http://www.world-cup[...] 2008-01-04
[8] 웹사이트 I due quinquenni Juventus.com 2024-06-27
[9] 뉴스 From the Vault: England and Italy do battle at Highbury in 1934 https://www.theguard[...] 2010-05-02
[10] 웹사이트 FIFA World Cup Awards: All-Star Team http://football.spor[...] 2015-08-19
[11] 문서 "なお現在の規定では禁止されているが異なる二か国でW杯へ出場した選手は[[フェレンツ・プスカシュ]](ハンガリーとスペイン)がいる。"
[12] 웹인용 Luis Monti https://www.olympedi[...] 2021-09-11
[13] 웹인용 Azzurro oriundo, ma serve in un Mondiale? http://www.gqitalia.[...] GQ Italia 2015-06-02
[14] 웹인용 The relationship between a player's age and their position on a football pitch https://www.theguard[...] 2016-01-22
[15] 뉴스 1934 World Cup: Italy wins for Il Duce http://www.cbc.ca/sp[...] 캐나다 방송 협회 2018-05-21
[16] 문서 Luis Monti http://www.planetwor[...]
[17] Sports-Reference https://www.sports-r[...]
[18] webarchive Death threat http://www.world-cup[...] 2008-01-04
[19] 뉴스 From the Vault: England and Italy do battle at Highbury in 1934 https://www.theguard[...] 2010-05-02
[20] 웹인용 FIFA World Cup Awards: All-Star Team http://football.spor[...] 2015-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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